현대 민주주의의 출발점, 서양 근대의 시민혁명!

2차시 : 프랑스혁명



" 프랑스의 국기와 국가는 언제 처음 만들어졌을까? "


프랑스의 삼색기의 각 색깔은 자유, 평등, 우애를 상징합니다. 또한 프랑스의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는 마르세유 지방 의용군의 노래에서부서 시작해서 프랑스의 국가가 되었는데요. 무서울 정도로 과격하고 호전적인 가사가 특징이지요. 둘 다 프랑스혁명(=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만들어지게 되는데요. 오늘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발전에 세계적으로 매우 큰 영향을 미쳤던 시민혁명인 프랑스혁명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합시다!





프랑스 혁명 발생 당시의 상황

18세기까지 프랑스는 절대왕정과 신분제가 유지되고 있는 사회였는데요. 전체 인구의 2%에 불과한 제1, 2 신분인 귀족과 성직자는 세금도 내지 않고 많은 특권을 지닌 반면에, 제3 신분인 평민은 정치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과도한 세금에 시달려야 했지요. 낡은 사회질서에 의한 이런 문제들을 통틀어 '구제도의 모순'이라고 부르는데요. 이는 프랑스혁명의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한편 18세기에 이르러 시민들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사회적으로 많이 성장한 가운데, 계몽사상미국혁명의 영향으로 시민들은 구제도에 점차 불만을 품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전쟁과 왕실의 사치로 프랑스의 재정까지 고갈되게 되지요.

프랑스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삼부회'라는 신분제 의회를 소집하게 되는데요. 이 '삼부회'는 각 신분의 사람들이 모여 회의하는 기구였지만, 제3 신분(평민)의 의견이 반영되기 어려운 회의기구였습니다. 그마저도 2세기가량 개최되지도 않았었지요.

오랜만에 개최된 삼부회에서 제3 신분 사람들은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반영시킬 있는 투표방식을 제안하는데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결국 쌓였던 불만이 폭발한 제3 신분 사람들은 삼부회를 박차고 나와서 별도의 회의기구인 '국민의회'를 만들고 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 구제도의 모순을 묘사한 그림 >


" 프랑스혁명 전개 과정의 대략적인 구분 "

국민의회 시기 → 입법의회 시기 → 국민공회 시기 → 총재정부 시기


< 테니스 코트의 서약(위) > 과 < 바스티유 감옥 습격(아래) >

국민의회 시기

국민의회를 만든 제3 신분의 사람들은 테니스 코트에 모여 새로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게 됩니다.(테니스 코트의 서약)

한편 화가 난 시민들은 구제도의 상징과 같았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게 되는데요. 혁명이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농촌 지방에서도 농민들이 일어나 귀족들을 공격하고 토지를 빼앗는 등 혁명이 전국화 되고 과격화되기 시작합니다.

이에 국민의회는 구제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봉건제 폐지를 선언합니다. 또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담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프랑스 인권 선언, 1789)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리고 국민의회는 테니스 코트에서 약속했던 대로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게 되는데요. 입헌군제의 내용을 담은 새로운 헌법을 만든 국민의회는 목표를 이루고 해산하게 됩니다.

<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

제1조 인간은 자유롭게 그리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

제2조 자유, 재산, 안전, 그리고 앞제에 대한 저항은 인간이 가진 불가침의 권리이다.

제3조 모든 주권의 원천은 국민에게 있다.

입법의회 시기

새로운 헌법에 따른 나라의 여러 법들을 만들기 위해 입법의회가 새롭게 구성됩니다.

한편, 기존의 신분제와 질서에 저항하는 혁명이 자신들의 나라에까지 퍼질까봐 두려워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프랑스의 상황을 경계하기 시작하는데요. 결국 입법의회 시기의 프랑스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시작하게 됩니다.(혁명전쟁)

이 시기 루이 16세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점점 커져 왕궁을 습격하는 상황까지 벌어지자 왕권이 정지되고, 새로운 헌법의 제정과 공화정 성립을 위한 국민공회가 조직되게 되면서 입법의회는 활동을 마치게 됩니다.

< 튈르리 궁전 습격 (1792년 8월) >

< 루이 16세의 처형 >

국민공회 시기

공화정을 선언한 국민공회는 로베스피에르와 같은 급진적인 사람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습니다. 결국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고, 보통선거를 규정한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졌지요.

국민공회는 급진적이고 과격한 여러가지 개혁 활동을 펼쳤는데요. 이 과정에서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들의 반발을 용납하지 않았고, 공안위원회혁명재판소 등을 동원하여 혁명에 반대된다고 판단되는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하는 이른바 '공포 정치'를 펼치게 됩니다.

초심을 잃은 공포정치에 국민공회 내에서도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는데요. 로베스피에르와 그 일파도 붙잡혀 처형당하게 됩니다. 결국 공포정치는 막을 내리고, 국민공회 시기도 끝나게 됩니다.(테르미도르의 반동)

총재정부 시기와 나폴레옹

1795년 새로운 헌법과 5명의 총재를 중심으로 정부가 운영되는 총재정부가 성립됩니다. 총재정부 시기에도 혁명에 휩싸인 프랑스는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나라 밖으로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의 전쟁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었는데요.

총재정부가 국내외의 이런 어려움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가운데, 혁명전쟁의 과정에서 유능한 군대 지휘관으로서 국민들의 영웅으로 떠오른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나폴레옹이지요.

결국 1799년 11월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차지하게 됩니다. 총재정부 시기가 끝나고, 나폴레옹을 제1통령으로 3명의 통령이 정부를 운영하는 통령정부가 수립되는데요. 1804년에 국민투표로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면서 프랑스혁명은 끝이 나게 됩니다.

이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는 한때 유럽 대부분 지역을 재패할 정도로 막강해지는데요. 나폴레옹의 활동으로 유럽 전역에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주의가 확산되고, 민족주의도 자라나게 됩니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오늘은 "프랑스혁명"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


함께 학습한 내용을 바탕으로

프랑스혁명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고 왜 중요한 사건인지

여러분의 생각을 자유롭게 아래에 스스로 정리해봅시다!



한걸음 더!

"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의 계승자일까? 찬탈자일까? "

프랑스 시민들이 자신들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웠던 프랑스혁명은 아이러니하게도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로 끝나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정복자 중 한명이면서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인물 중 한명입니다. 물론 나폴레옹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은데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위 영상과 함께 다양한 자료를 검색해 본 후 나폴레옹에 대해서 평가해봅시다!





사용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ko.wikipedia.org), 비상교육 교과서 중학교 역사①

내용구성 : 남정일(대구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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